당신이 바에 갔을 때, 알아볼 수 없는 단어들이 있는 메뉴판을 뒤적거리다가
'마티니'가 나오면 그저 반가워서 적당히 주문해 본 적 있거나
그 생각보다 맛없는 마티니를 또 억지로 마셔본 경험이 있는가?
기왕 마실 거면 마티니에 성격이나 구조, 레시피에 대해 알고 있으면
내가 마시고 싶은 상황이나 타이밍에 적절히 선택하여
기분 좋게 마실 수 있다.
아마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칵테일은 마티니이고,
이것은 제임스 본드 형님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기본 레시피는 아주 단순해 보이는 진(또는 보드카)과 드라이 버무스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생각보다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현대에는 정말 수많은 종류의 변형된 마티니가 존재한다.
이제는 과일이든 뭐든 먹을 수 있는 재료는 다 갖다 붙이면 된다.
딸기, 수박, 멜론, 사과, 포도, 망고, 오렌지 등등 마티니를 만들 수 없는 재료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과일뿐만이 아닌 초콜릿이나 유제품 계열로도 만들 수 있고,
허브나 야채를 사용하기도 하며,
커피를 이용한 마티니는 이젠 너무 유명해졌다.
마티니의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시대이지만
이 글에서는 변형된 스타일이 아닌,
진과 버무스를 사용한 오리지널에 가까운 마티니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IBA에서는 '드라이 마티니'라고 불리고 있다.
그렇다. 제임스 본드의 그것과 킹스맨에서 나온 그것이다.
영화에 나온 제임스본드 마티니나, 에그시 마티니에 관해서는
별로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간단하게 서치 해도 자료는 엄청 많이 나오니 궁금하면 각자 찾아보길.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현실의 bar에서 마티니가
실제로 어떻게 인식되고 있고 만들어지고 있고
어떻게 주문되고 서브되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현실을 살아 제발
또한 여러분들이 bar에 가서 마티니를 주문하는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가 되길 바란다.
국내로 한정했을 때, '드라이 마티니'라는 칵테일의 포지션은 어느 위치일까?
사실 아직도 마티니는 체험과 도전의 영역이다.
마티니를 진정으로 즐기는 소비자는 100명 중 10명이 안된다.
어디선가 들어본 유명한 칵테일이기 때문에 호기심에 주문하는 경우가 많고,
맛보다는 감성을 채우기 위한 용도로 많이 쓰인다.
이게 절대로 잘못되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바에서 어떤 칵테일이든 그 자체의 맛으로만 소비되는 것이 아니다.
바텐더들은 손님에게 맛뿐만이 아닌 다양한 경험과 즐거움,
술을 즐기는 그 자체의 시간에 가치를 두어 서비스를 한다.
우리는 바에 가서 언제나 능숙하게 마시던 술만을 마실 수는 없다.
영화나 책, 다른 미디어에서 나온 술을 마셔보기도 하고
난생처음 본 모르는 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도전하고 경험하는 것이
바를 즐기는 좋은 방법이다.
다만, 약간의 지식이나 팁이 더해져 시야가 넓혀진다면 더더욱 즐겁게 바를 즐길 수 있다.
우선 마티니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알고 가자.
1. 진
2. 버무스
3. 올리브
4. 레몬 껍질(의 에센스)
5. 비터(옵션)
이 이외의 나머지는 옵션이다.
진과 버무스를 믹싱글라스에 일정 비율로 넣고 저어서 글라스에 따라낸 후
올리브와 레몬껍질로 마무리한다.
이렇게 문장으로 보면 간단해 보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주문하는 사람 입장에서 요청할 수 있는 요소들이 생각보다 많다.
1. 진(Gin)과 버무스(Vermouth)의 브랜드 선택하기
대부분의 바에서는 마티니의 레시피를 꽤나 치밀하게 설계해 놓기 때문에
본인이 죽어도 마시기 싫은 브랜드가 아니라면
웬만해선 업장의 선택에 맡기는 게 제일 좋다.
그러나 아주 가끔, 바텐더가 수상해 보일 때가 있다.
이 사람이 만든 마티니는 왠지 위험해 보인다면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베이스는 어떤 걸 사용하시나요?'
'진은 뭘로 해주시나요?'
'버무스는 혹시 뭘 쓰세요?'
이 정도로만 가볍게 물어보면 바텐더는 여러 브랜드를 소개해주면서
자기가 만들 마티니의 방향을 간단하게 설명해 줄 것이다.
- 스탠더드 하게 기본에 충실한 마티니를 만들 것인지
- 버무스의 양을 늘려 마시기 편하게 할 것인지,
- 드라이하게 할 것인지,
- 혹은 독약을 제조할 건지 등등
바텐더의 설명을 들으며 함께 원하는 방향을 설정해 나가면 된다.
*마티니를 주문했을 때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만드는 바텐더는
정말로 수상쩍긴 하지만, 높은 확률로 맛있는 마티니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2. 진과 버무스의 비율 설정하기
쉽게 말하자면 독하게 먹을 것인지, 덜 독하게 먹을 것인지 선택하는 것이다.
'마티니 안 독하게'는 없다. '리버스마티니' 이딴 걸 먹느니 더 맛있는 칵테일이 많다.
마티니를 포함한 칵테일의 레시피는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내가 처음 바텐더를 시작할 당시에 마티니의 표준 레시피가
3:1에서 4:1 정도로 기억하는데, 2024년 기준으로는 6:1이다.
스위트한 게 유행했다가, 드라이한게 유행했다가, 다시 스위트한 게 유행했다가
업계에서도 바텐더의 취향이 많이 타는 칵테일 중 하나다.
사실 스위트이니 드라이니 하는 것도 주관적이고 상대적이지 않은가?
비율 또한 각 업장에서 정해진 레시피가 있기 때문에 너무 떡 주무르듯 요청하면 실례이다.
게다가 어차피 여러분들은 더 드라이하게 먹고 싶을게 분명하기 때문에
'조금 드라이하게 부탁드립니다.'
'도수 높게 해 주세요'
이 정도면 딱 좋다.
3. 올리브를 어떻게 내어줄 것인지 선택하기
만약 올리브를 좋아한다면 얼마든지 많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마티니에 담가져서 나오는 게 싫으면 따로 서브해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다.
물론 싫으면 아예 빼달라고 해도 된다.
개인적으로는 씨가 포함된 퀄리티 좋은 큼직한 올리브 한 개 정도만 술에 담가 먹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3개 이상의 올리브가 칵테일픽에 꽂아져서 서브되는 마티니는
올리브의 뉘앙스가 술의 맛을 방해하게 되어 밸런스를 해친다.
그렇다고 아예 안 넣으면 그 특유의 감칠맛이 사라진다.
마티니는 식전주로도 널리 사용되던 칵테일이기 때문에
입맛을 돋우는 감칠맛과 짭짤한 뉘앙스가 함께하는 것이 어울린다.
올리브의 개수, 그리고 서브되는 형식을 본인에게 맞게 요청할 수 있다.
4. 레몬껍질의 사용 여부
칵테일 제조 마지막 단계에, 글라스 주변에다가 멋진 손짓으로
레몬껍질을 휘릭휘릭 짜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레몬껍질에서 나오는 에센스는 마치 향수처럼 좋은 향과 인상을 주면서
마티니의 첫인상을 결정한다.
갓 서브된 마티니를 들어 얼굴 쪽으로 가까지 가져올 때 피어나는
진과 버무스의 보태니컬 한 뉘앙스와 차가운 냉기,
레몬의 산뜻한 향이 함께 조화롭게 느껴질 때
내 혀에서부터 시작하여 온몸의 세포와 혈관까지
마티니를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다만 바텐더의 테크닉이 부족하거나 레몬의 관리상태가 좋지 않다면
오히려 향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거나, 맛에도 영향을 끼치거나, 심지어 비린 냄새가 나기도 한다.
바텐더의 나이가 너무 어려 보이거나, 칵테일을 만드는 모양새가 어설프게 느껴진다면
레몬필은 정중하게 거절하는 것도 좋겠다.
지금까지 마티니 즐기는 방법 중에서도 칵테일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중심으로
여러분들이 취사선택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다.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것들이지만 이것들도 모른다면
내가 무엇을 어떻게 원하는지 조차 알 수가 없다.
바텐더들에게도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
마티니를 주문하는 고객에게는 한 번 더 물어보고 취향을 파악하고
무엇을 어떻게 원하는지, 진심으로 마티니를 원하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런 소통도 없이 그냥 주문대로 무지성으로 만들어 내는 바텐더는
전문가로서 꽤나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이 글까지 찾아와 읽으며 마티니를 알아가려고 노력하는 당신에게는
바의 신이 미소를 지어주길 바란다.
Che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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