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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관한이야기

난.. 슬플 땐 '김렛(Gimlet)'을 마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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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렛

김렛이랍시고 라임주스나 레몬주스에 진을 타고
설탕이랑 비터스를 잔뜩 뿌려 내놓는단 말이야.
진짜 김렛은 진에 로즈사 라임주스를 반반씩 타고
아무것도 섞지 말아야지

그렇게 만들면 마티니 따위는 상대도 안 되거든.

레이먼드 챈들러, <기나긴 이별>

김렛의 기원 

만화 원피스 초반부에 '괴혈병'에 관련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조로의 후배쯤 되는 인물이 치아가 빠지고 피를 토하는 등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쓰러진 상황에서 루피의 일행과 만나게 된다.

원피스 한장면 라임

이를 보고 나미는 무슨 일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능숙하게 루피와 우솝에게 주방에 있는 라임을 즙으로 짜서 가져오게 하여

환자에게 마시게 하는 빠른 판단을 내린다.

라임즙을 먹이는 장면

나미는 이것이 '괴혈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식물성 영양(비타민c) 부족이 원인임을 동료들에게 알려준다.

이로써 루피 일행은 장거리 항해에 필요한 식량관리와 영양 섭취의 중요성을 깨닫고

요리사 포지션인 '상디'를 찾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영양의 중요성


괴혈병과 라임주스

괴혈병 라임주스 그리고 술

실제 역사에서도 괴혈병은 장거리 해로가 개척된 15세기에서 19세기 사이 400여 년간

뱃사람들에게 재앙과도 같은 골칫거리였다.

19세기 초반쯤이나 돼서야 오렌지나 레몬 등 산미가 있는 과일을 먹으면

괜찮아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선내에는 값싼 라임을 보급하게 된다.

 

생으로 라임을 먹기에는 시고 떫고 향이 너무 강해서 설탕이나 술을 섞어서 마셨고

결국에는 맛과 보존력을 높인 라임주스를 시판하여 보급하게 되었고

이때 선내에 보급되고 있던 '진(Gin)'과 만나면서

현재의 '김렛'이라는 칵테일의 초기 형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단순함에서 오는 매력

김렛의 재료는 진, 라임주스, 설탕(시럽), 이렇게 단 3가지이다.

얼마든지 재료를 더 다양하게 사용해서 복잡하게 만들 수 있지만

클래식한 기본재료는 술, 시트러스, 당 <- 딱 이 조합이다.

이렇게 단순한 조합이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이유는 뭘까?

깔끔한 김렛

 

잘 만들어진 김렛은 차가운 온도와 절제된 단맛,

진의 알코올도수와 향이 찌르듯 올라오는 날카로움,

정신이 번쩍 드는 라임의 상쾌함이 어우러진 것이 특징이다.

 

차가움, 날카로움, 샤프한, 드라이, 등이 김렛의 이미지를 나타내기에 좋은 단어들이다.

반대로 얘기하면 따듯함, 풍성한, 달콤한,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김렛의 이미지를 잘 사용한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기나긴 이별>에서는

주인공이 죽은 인물을 추억하고 회상하거나 할 때 '김렛'을 마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차갑고 비정한 하드보일드 소설 속의 고독하고 쓸쓸한 주인공의 분위기가

'김렛'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와 비슷하게 묘사된다.

 

챈들러 소설에 나오는 김렛은 영국 로즈사의 라임주스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 로즈사의 라임주스가 한국에는 수입되지 않기 때문에

국내 bar에서는 신선한 생라임을 착즙 한 주스에 심플시럽을 사용한 레시피를 주로 사용한다.

 

이 레시피는 일본 바텐딩의 영향이 어느 정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인기 있는 클래식 칵테일의 전반적인 스타일은 도수가 높고 당도가 적은 것이 많다.

김렛 또한 로즈사의 라임주스를 사용한 것은 일본인이 마시기에는 너무 달았기 때문에

생라임과 약간의 설탕 또는 시럽만을 사용해서 레시피를 현지화했을 것이다.

 

이렇게 만드는 편이 김렛(Gimlet)을 의미하는 목공용 송곳의 날카로운 이미지와도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김렛을 바에서 즐기는 법

우리는 가끔 차가운 도시의 쓸쓸한 한 인간이 되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뭔가 고독을 씹고 싶은 마침 비 오는 날에 무채색의 어두운 옷을 입고 바에 간다.

모자를 눌러써도 좋다. 다만 주문할 때는 벗던지 살짝 챙을 들어서 눈을 보고 주문한다.

최소한의 예의정도는 갖추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필하는 거다.

그래야만 바텐더가 당신을 경계하지 않는다.

 

안내해 주는 자리에 착석하고 메뉴를 준비해 주면 보지 않는다.

메뉴판 볼 필요가 없다. 김렛은 첫 잔으로도 괜찮기 때문에

말을 좀 아끼면서 주문한다. 사족은 붙이지 않는다. 

 

"김렛.. 한잔 주세요."

"김렛으로 부탁드립니다"

 

딱 이 정도면 충분하다.

 

바텐더가 별말 없이 주문은 받고 바로 만들어 주면 정말 좋겠지만

솔직히 이렇게 주문하면 너무 수상하게 보이긴 한다.

90%의 확률로 되묻는 경우가 생긴다.

이때도 최대한 무례하지 않는 선에서 말을 아끼며 간결하게 대답한다.

 

"좋아하는 스타일이 있으세요?" -> "딱히 없습니다. 맡길게요"

"아.. 드셔보신 적 있으신가요?" -> "네.. 마셔봤어요.. 좋아합니다."

"진은(베이스는) 뭘로 해드릴까요?" -> "음.. 무난한 걸로.."

"아 김렛 좋죠. 어떻게 해드릴까요?" -> "드라이하게 부탁드려요.."

"핸드릭스진으로 괜찮으시죠?" -> "핸드릭스는 싫은데요."

 

 

질문의 상황에 따라서 이 정도로 답해주면 된다.

포인트는 무례하지 않게 간결하게.

 

바텐더 술 만드는거 구경하기

 

주문한 김렛이 나오면 절대로 사진 찍지 않는다.

곧바로 잔을 들고 향을 한번 스윽 맡아준 뒤 크게 한 모금 마신다.

1/3에서 절반까지 마셔도 괜찮다.

 

이제 핸드폰이나 만지면서 시간을 때우거나 매장에서 나오는 음악을 듣거나

백장의 술병을 멍하니 구경하거나, 바텐더들 움직이는 거 슬쩍슬쩍 훔쳐보면서 고독한 나를 즐긴다.

이러고 혼자 놀고 있으면 분명히 바텐더가 다시 와서 말을 건다.

진정한 바텐더는 혼자 와서 김렛 주문하는 손님 못 참는다.

 

입맛에 맞는지 물어보거나 불편한 게 없는지 더 필요한 게 없는지 물어보는 순간

여기서 당신의 놀이는 끝이 난다. 이때부터는 그냥 자연스럽게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바텐더가 이끌어 주는 대로, 표정도 좀 풀고 웃기면 웃기도 하면서 편하게 즐기면 된다.

너무 오래 컨셉 유지하면 서로 피곤하다. 딱 여기까지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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