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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관한이야기

이터널 선샤인에서 클레멘타인이 조엘 꼬실때 마셨던 '봄베이 사파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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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엘과 클레멘타인의 만남

 

갓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나는 한창 사랑이라는 것에 관심이 많을 그 나이에 이 영화를 만났다.

 

이 영화를 보고 난 이후로 나는 사랑에 빠지게 되거나,

이별을 하게 되거나

누군가에게 관심이 생기거나

외로운 기분이 들거나

또다시 누군가를 만나거나 할 때마다 이 영화를 다시 보았고

지금까지 20번 정도는 보았다.

 

'이터널 선샤인' 좋아하는 사람 많을 것이다.

물론 나에게도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에 하나이며

살면서 이 영화가 재미 없다고 하는 사람 만나본 적이 없다.

좋아하는 포인트는 서로 다르고, 느낀 감정들도 다양해서

이 영화에 대해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다.


청량한 컬러의 봄베이

 

'봄베이 사파이어'라는 '진'의 한 브랜드가 이 영화에 등장한다.

물론 20살때 처음 봤을 때는 봄베이가 나오는지도 몰랐다.

클레멘타인이 무슨 칵테일을 만드는 것까지는 인지했지만

그 술이 봄베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거의 10년 정도는 지나서였다.

 

바텐더 경력이 점점 쌓였고, 세상의 수많은 술병들이 눈에 익어 익숙해지다 보니

보틀 쉐입이나 색깔, 라벨 디자인만 대충 스윽 봐도 

어떤 술인지 알만한 시기가 되었을 때 그제서야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마시던 술이 봄베이로 만든 칵테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화 내에서는 클레멘타인이 이 술을 좋아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둘이 함께 마시는 장면에서도 나오고

영화 초반에 어느 카페에서 클레만타인은 가방에서 작은 봄베이 병을 꺼내

종업원들 몰래 커피에 타먹는 장면도 나온다.

커피에 봄베이 타먹는 클레멘타인

 

스치듯이 아주 잠깐 나온다. 위의 장면 1~2초 정도가 전부이지만

독특한 봄베이 병의 디자인을 이제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세상에 많은 술 중에서 왜 하필 봄베이 인가?

클레만타인이 좋아하는 술을 봄베이로 설정한 미셸 공드리 감독의 저의는 무엇일까?


봄베이 사파이어와 클레멘타인

봄베이와 클레멘타인의 공통점

봄베이의 영롱한 파랑색 디자인은 클레멘타인의 이미지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클레멘타인은 머리색을 자주 바꾸는 걸 좋아하는데,

영화 초반 기차에서 조엘을 만났을 당시의 머리색이 파랑색이었다.

 

다소 차갑게 느껴지기도 하는 이 파랑색은 클레멘타인의 감정과 성격을 나타내기도 한다.

쿨하고 직설적이고 시원시원한 능동적인 이미지도 있고,

약간은 사람을 경계하는듯한 날카로운 이미지와 함께 어우러져

결국에는 두 가지의 상반되는 이미지가 섞여 신비스러운 느낌을 준다.

 

클레멘타인의 머리색의 이름과

마시는 칵테일의 이름은 둘 다 블루 루인(Blue Ruin)으로 같다.

블루 루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칵테일을 만드는데 쓰이는 술을

영롱한 파랑색 보틀의 '봄베이사파이어'로 설정한 것은

클레멘타인의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한 감독의 의도가 분명하지 않을까?

 

위스키도 아니고 보드카도 아닌 '진(Gin)'이라는 점도 아주 마음에 든다.

감독은 분명히 '보드카'를 두고 고민을 많이 했을 것 같다.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추운 이미지이다.

배경이 겨울이기도 하고, 기억을 지운다는 소재 자체가 차갑고 냉정한 이미지를 준다.

알다시피 보드카는 주로 추운 나라에서 생산된 것이 유명한 브랜드가 많다.

러시아의 스미노프, 폴란드의 벨베디어, 스웨덴의 앱솔루트

핀란드의 핀란디아, 아이슬란드의 레이캬 등등.

 

그래서 어느 한편으로는 보드카도 왠지 이미지와 어울렸을 것 같긴 한데,

결국 결정된 건 '진'이 되었고, 이 이유는 특유의 '맛'이 몫 했을 것이다.


늠름한 봄베이

 

런던 드라이진의 이단아 봄베이

진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봄베이'는 꽤나 문제아 취급을 받는다.

다른 진에 비해서 봄베이는 알코올이 잘 정제되지 못한 투박한 느낌도 있고

다양한 향들이 엄청 화려하게 자극적으로 올라온다.

투박하고 거칠고 강렬하고 다채로운 이미지를 가진 봄베이는,

분명 클레멘타인의 히피적이고 자유분방하고 통통 튀는 성격과 거의 일치하게 된다.

 

무색무취가 특징인 보드카는 분명히 단단하고 차가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클레멘타인의 다채롭고 개성적인 성격을 담아내기에는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문제아' 혹은 '이단아', '아웃사이더' 같은 이미지에는 봄베이가 딱이긴 하다.

 

클레멘타인과 봄베이를 이렇게 억지로? 공통점을 찾아 연결해 본 이후에

나는 봄베이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마시기 조금 부담스럽다고 느꼈던 브랜드인데

이제는 바에서 칵테일을 주문할 때 좋은 옵션 중 하나가 되었다.


한국의 여러 술과 관련된 커뮤니티에서 봄베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송충이'라고 불리면서 진을 제대로 마실줄 모르는 사람처럼 놀리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가벼운 재미나 문화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게 좀 과열되다 보면
봄베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눈치를 보게 되고, 다른 진으로 갈아타야 하나 싶기도 할 것이다.

봄베이의 매력이 터부시되고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이 조금은 안타깝긴 하다.

 

가끔 우리는 좀 삐뚤어지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럴 땐 이터널 선샤인의 자유로운 영혼, '클레멘타인'을 떠올리며 봄베이를 한잔 마셔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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